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옥산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10월 상하이 주재 공사관부 육군 부무관 다나카 류키치(田中 隆吉) 소좌는 봉천 특무기관의 하나타니 소좌의 호출전보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일본 육사 26기 동기로 중국에 공작을 하고 있던 대표적인 일본군인들이었는데 이때 하나타니 소좌는 심양에 도착한 류키치를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소개시켜주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일본 정부가 [[국제연맹]]으로부터 아주 나쁜 인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관동군의 계획이 마음 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지금 관동군은 하얼빈을 점령하고자 하고 있으며 내년 봄에는 만주독립을 실현할 예정이다. 만주국 수장에는 [[선통제|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추대할 게획인데, 이미 도이하라 대좌가 톈진에 가서 푸이와 접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밀고 나가게 되면 국제연맹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이고 일본 정부도 찬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인데, 이때 상하이에서 사건을 일으켜 서방 측 열강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고 싶다. 이타가키는 다나카에게 공작금 2만엔을 주었으며 관동군 센다 대위 등을 붙여 지원해주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다나카는 다시 상하이의 일본 섬유회사로부터 10만 엔의 공작금을 더 빌렸고 여기에 [[가와시마 요시코]]가 합세했다. 이들은 일본인 살해 사건을 조작하여 일본인과 일본 거류민들의 분노를 촉발할 계획을 꾸몄다. 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천황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사쿠라다몬 의거]](桜田門義擧, 앵전문의거)가 벌어지자 상하이의 민국일보가 ''''불행하게도''' 부차가 약간 폭파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보도했고, 이것이 상하이의 일본 거류민을 비롯한 일본을 크게 자극한 것이었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는 상하이 시장 우톄청에게 이를 강력 항의했고 우톄청은 민국일보에게 기사를 취소하게 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다나카가 이미 이 떡밥을 물어버린 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